네모토 리쿠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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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네모토 리쿠오는 일본의 야구 선수, 감독, 구단 경영자이다. 선수 시절에는 긴테쓰 펄스에서 포수로 활약했으며, 은퇴 후에는 긴테쓰에서 코치와 스카우트를 거쳤다. 히로시마 도요 카프와 크라운라이터 라이온스, 세이부 라이온스, 후쿠오카 다이에 호크스에서 감독을 맡았고, 세이부와 다이에에서는 구단 경영에도 참여했다. 그는 선수 영입과 트레이드에서 독창적인 전략을 사용하여 '네모토 매직'으로 불렸으며, 세이부와 다이에의 황금기를 구축하는 데 기여했다. 2001년에는 일본 야구 명예의 전당에 헌액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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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모토 리쿠오 - [인물]에 관한 문서 | |
---|---|
기본 정보 | |
이름 | 네모토 리쿠오 |
로마자 표기 | Rikuo Nemoto |
가나 | ねもと りくお |
한자 | 根本 陸夫 |
출생일 | 1926년 11월 20일 |
사망일 | 1999년 4월 30일 (향년 72세) |
출생지 | 이바라키현 나카군 이시가미촌 |
신장 | 171cm |
체중 | 64kg |
포지션 | 포수 / 코치 / 감독 |
투구/타석 | 우투우타 |
선수 경력 | |
고등학교 | 구제 이바라키 중학교 구제 니혼 대학 제3중학교 |
대학교 | 니혼 대학 호세이 대학 |
실업 | 콜롬비아 |
프로 | 긴테쓰 펄스 (1952 ~ 1957) |
감독/코치 경력 | |
코치 | 긴테쓰 펄스 (1962 ~ 1966) |
감독 | 히로시마 카프/히로시마 도요 카프 (1967 ~ 1972) 크라운라이터 라이온스/세이부 라이온스 (1978 ~ 1981) 후쿠오카 다이에 호크스 (1993 ~ 1994) |
프로 입단 정보 | |
입단 년도 | 1952년 |
첫 출장 | 1952년 |
마지막 출장 | 1957년 |
수상 및 기록 | |
명예의 전당 | 2001년 (경기자 부문) |
NPB 성적 | |
타율 | 0.189 |
홈런 | 2 |
안타 | 70 |
타점 | 23 |
도루 | 4 |
2. 선수 시절
1952년 일본 콜롬비아의 실업 팀인 '가와사키 콜롬비아'를 거쳐 긴테쓰에 입단하여 1957년까지 선수 생활을 했다. 1953년에는 주전 포수로 기용되었으나, 1954년에는 다다 후미히사, 하라 가쓰히코에게 주전 자리를 내주었다. 1955년부터 1956년까지는 프로 경험이 없는 아쿠타 다케오 감독을 지원했으며, 주로 네모토가 투수 로테이션을 결정했다[8]。
2. 1. 프로 입단 전
이바라키현 미토시의 자산가 집안에서 태어나 이시가미 촌(현재의 도카이촌)에서 성장했다. 아버지 도키노스케는 미토에서 장사를 했지만 네모토가 태어나자 할아버지의 가업을 잇기 위해 이시가미 촌으로 이사했다. 이시가미 촌의 촌장이 되어 인접한 무라마쓰 촌과 합병하여 두 기간 동안 촌장을 역임하며 일본 원자력 연구소 유치를 결정했다. 네모토는 할아버지로부터 "언젠가 네모토 가를 지탱할 인물"이라는 말을 들으며 정교회의 유아 세례를 받았다. 할아버지가 학문을 좋아해 네모토에게도 공부를 시켜 이시가미 촌의 초등학교에서 미래를 생각해 미토 시내의 산노마루 초등학교로 전학시켰다. 이때 젊은 변호사를 교사로 소개받았는데, 이 변호사가 야구를 매우 좋아해 둘이서 성터에서 캐치볼을 했고, 중등 야구와 도쿄 6대학 야구 이야기를 네모토에게 들려주었다. 또한 귀가 후에는 당시 지방에서는 드물었던 콘크리트 이층집 벽에 공을 던지며 혼자 야구를 즐겼다. 이를 통해 병약했던 네모토는 튼튼한 청년이 되었다. 지역의 이바라키 중학교에 진학했으나 퇴학 처분을 받아 니혼 대학 제3중학교(현재의 니혼 대학 제3고등학교)로 옮겨 은사인 후지타 쇼조 감독을 만나 세키네 준조와 함께 지도를 받았다. 종전 후 니혼 대학 예과에서 야구를 다시 시작해 다미야 겐지로와 배터리를 짰으며 도토 대학 야구 연맹 리그에서 수위 타자를 획득했다. 이때 임시로 릿쿄 대학에도 '들어가 있던' 것이 발각되어 출장 정지 처분이 내려졌다. 이 '들어가'라는 것이 릿쿄에 입학하고 플레이를 한 것인지, 아니면 단순히 야구부의 선택을 받은 정도였는지는 불명이다. 이 징계 기간 동안 모교인 니타이산의 감독을 맡았다. 이후 호세이 대학 감독으로 부임한 후지타에게 거두어져 호세이 대학으로 이동해 다시 한번 세키네와 배터리를 짜게 되었다. 이 시기에 강경파 학생으로 활동하며 안도 노보루를 알게 되었다.2. 2. 프로 선수 시절
1952년 일본 콜롬비아의 실업 팀인 '가와사키 콜롬비아'를 거쳐 긴테쓰 펄스에 입단했다. 개막부터 선발 마스크를 쓰고 시즌 후반에는 부상으로 인해 부진했지만 36경기에 선발 출장했다. 세키네를 필두로 투수들이 기분 좋게 던질 수 있도록 하는 포수로서 평판이 높았으며[8], 뛰어난 기억력은 투수진과 수뇌진 모두에게 의존되었다.1953년에는 주전 포수로 기용되었다.
1954년에는 다다 후미히사, 하라 가쓰히코에게 주전 자리를 내주었다.
1955년부터 1956년까지는 후지타의 후임으로 프로 경험이 없는 아쿠타 다케오 감독을 지원했으며, 주로 네모토가 투수의 로테이션을 결정했다[8]。
1957년 은퇴했다.
3. 은퇴 후
히로시마 퇴단 후, 네모토는 친구와 함께 철강업을 경영하면서 아사히 방송 해설자(1973년 ~ 1977년)로 활동했다.[15]
1976년에는 신일철 사카이의 임시 코치를 맡아 입사 직후의 오바나 타카오를 지도했다. 오바나는 네모토의 지도로 투구폼을 교정하여 구속이 빨라지는 등 실력 향상에 큰 도움을 받았다고 회상했다.[16]
1977년 시즌 오프에는 배우로 전향했던 안도 노보루로부터 크라운 라이터 라이온즈를 도와달라는 요청을 받았다. 구단 관계자가 아닌 친구 안도로부터의 요청에 네모토는 당황했지만, 안도의 물밑 작업으로 구단으로부터 정식 요청이 오면 수락하기로 했다.[15]
3. 1. 긴테쓰 코치 및 스카우트 시절
根本 陸夫|네모토 리쿠오일본어는 1957년 현역에서 은퇴한 후 스카우트를 거쳐 1962년부터 1966년까지 긴테쓰의 코치를 역임했다. 이 기간 동안 벳토 가오루 감독과 함께 '18세의 4번 타자' 도이 마사히로를 육성해냈다.[18]3. 2. 히로시마 감독 시절
1967년 히로시마 카프의 하세가와 료헤이 감독 아래서 코치를 맡았다. 1968년 팀은 '히로시마 도요 카프'로 운영 형태가 변경되었고 네모토는 새로운 체제에서 감독으로 취임했다. 오너인 마쓰다는 "시즌 전패도 상관없으니 팀의 기초를 만들어달라"고 요구했다. 네모토는 코치로 고모리 미쓰오를 초빙했으며 한신 타이거스에서 야마우치 가즈히로를 영입했고 선수들에게 맹연습을 시켰다. 또한 식사면에서도 제한하는 조치를 취하는 등 같은 해 68승 62패로 3위를 차지해 카프 구단을 창설 이래 첫 A클래스로 이끌었다.1969년에는 최하위로 전락했지만 1970년 코치로 세키네, 내야 수비 코치로 히로오카 다쓰로를 초빙했다. 세키네와 히로오카 모두 지도자 경력의 시작이었으나 같은 해와 다음 해인 1971년에는 4위와 승률 5할 이상으로 건투했고 그 동안 기누가사 사치오, 야마모토 고지, 미즈타니 지쓰오, 미무라 도시유키 등을 육성해 빨간 헬멧 황금 시대의 초석을 마련했다. 그러나 1972년 개막전부터 부진이 이어져 시즌 도중에 휴식했고 그대로 사임했다. 사임 후에도 팀을 만드는데 히로시마 구단주의 상담에 응했다.
3. 3. 크라운라이터·세이부 감독 및 프런트 시절
根本 陸夫|네모토 리쿠오일본어는 '구계의 책략가'라는 별명으로 불렸으며, 드래프트 회의와 트레이드에서 뛰어난 수완을 발휘하여 '根本マジック|네모토 매직일본어'이라는 평가를 받았다.[15] 실질적인 단장(GM)으로서의 능력을 발휘했다.감독으로서는 뚜렷한 성적을 내지 못했지만, 히로시마, 세이부, 다이에의 첫 우승을 위한 기반을 다졌다.
1977년 크라운라이터 라이온스 감독으로 취임하여 침체된 팀의 구조 조정을 시도했다. 1978년 국토 계획의 쓰쓰미 요시아키 사장이 구단을 인수하여 구단명이 '''세이부 라이온스'''로 변경되었고, 네모토는 초대 감독이 되었다.
세이부 감독 시절에는 관리 부장도 겸임하며 팀 만들기를 진행했다. 1978년 드래프트 회의에서 모리 시게카즈를 1순위로 지명하고, 마쓰누마 히로히사, 마쓰누마 마사유키 형제를 영입했다. 한신에서 다부치 고이치, 후루사와 겐지를, 롯데에서 야마자키 히로유키를 트레이드로 획득하고, 노무라 가쓰야도 영입했다.
1979년에는 미국 플로리다에서 스프링 캠프를 진행했지만, 개막 12연패를 기록하며 최하위에 머물렀다.
1980년 후반기에는 우승 경쟁을 벌였고, 1980년 드래프트 회의에서 이시게 히로미치 등 4명을 지명하고, 아키야마 고지를 영입했다. 이토 쓰토무를 연습생으로 영입하고, 이듬해 드래프트에서 1순위로 지명했다. 구도 기미야스도 설득하여 입단시켰다.
1981년 감독을 퇴임하고 관리 부장으로 전임, 히로오카 다쓰로를 감독으로, 모리 마사아키를 코치로 초빙했다. 네모토는 실질적인 GM으로서 세이부 황금 시대를 구축했다.
히로오카 감독은 1982년부터 2년 연속 일본 시리즈 우승을 차지했지만, 네모토와 팀 강화 정책을 둘러싸고 대립했다. 1985년 리그 우승 후 히로오카는 사임했다.
히로오카의 후임으로 모리 감독이 취임하고, 1985년 드래프트에서 기요하라 가즈히로를 지명했다. 모리 감독은 세이부의 황금 시대를 이끌었다.
네모토는 폭넓은 인맥을 바탕으로 '네모토 매직'이라 불리는 선수 획득 수완을 발휘했다. 세이부 시절에는 드래프트 외부 제도와 프린스 호텔 야구부를 활용했다.
3. 4. 다이에 감독 및 프런트 시절
球界の寝業師|구카이노 네와자시|일본어 발음일본어라는 별명으로 불렸으며, 드래프트 회의와 트레이드에서 뛰어난 수완을 발휘하여 '''네모토 매직'''(일본어: 根本マジック)이라고 불렸다. 직함은 달랐지만 실질적인 단장(GM)으로서 그 실력을 발휘했다.[15]1993년 나카우치 이사오의 초빙으로 세이부를 퇴단하고 후쿠오카 다이에 호크스의 대표 이사, 전무 겸 감독으로 취임했다. 당시 팀은 1978년부터 계속 B클래스(4~6위)를 맴돌았고, 네모토는 세이부 시절과 비슷한 방식으로 팀 재건에 착수했다. 현장 복귀 첫 해인 1993년에는 최하위에 머물렀지만, 시즌 종료 후 아키야마, 와타나베 도미오, 우치야마 도모유키와 사사키 마코토, 무라타 가쓰요시, 하시모토 다케히로를 맞바꾸는 대형 트레이드를 단행했다. 또한 같은 해부터 실시된 자유 계약(FA) 제도로 한신에서 마쓰나가 히로미를, 드래프트에서 고쿠보 히로키와 와타나베 히데카즈를 영입했다.
1994년 감독직에서 물러나 전무에 전념했다. 후임 감독으로는 오 사다하루를 초빙했다. 드래프트에서는 고마자와 대학 진학 예정이었던 조지마 겐지를 영입했고, 세이부의 주축 선수였던 구도를 FA로 영입했다. 또한 세이부 감독 취임이 확실시되던 이시게를 초빙하는 등 다이에에서도 '책략가'의 면모를 유감없이 발휘했다.[15]
12년 만의 현장 복귀였던 다이에 감독 시절에는 과거의 열정적인 모습은 사라지고, '책략가'라는 별명과는 어울리지 않게 마운드로 향하던 중 다리가 꼬이는 장면이 TV 프로그램에 방영되기도 했다. 하지만 가끔 격렬한 항의로 퇴장당하는 일도 있었다. 또한 세이부 시절에는 히로오카와 모리로 대표되는 관리 야구의 신봉자였지만, 다이에에서는 2번에 야마모토 가즈나리를 기용하는 등 과감한 지휘를 선보이기도 했고, 모리와 히로오카처럼 전략 면에서 세세한 지시를 내리는 일도 없었다고 한다.
다이에 재임 기간 동안 요시타케 신타로, 고쿠보, 와타나베, 조지마, 후지이 마사오, 사이토 가즈미, 사쿠모토 마사히로, 이구치 다다히토, 마쓰나카 노부히코, 시바하라 히로시, 구라노 신지, 나가이 도모히로, 시노하라 다카유키, 호시노 준지 등을 드래프트에서 획득하여 다이에의 첫 우승과 현재까지 이어지는 지역 인기의 기반을 다졌다. 또한 마쓰나가, 히로타 히로아키, 다케다 가즈히로, 다무라 후지오, 나가도미 히로시, 니시무라 다쓰지, 야마사키 신타로 등 다른 구단에서 활약한 베테랑 선수들을 영입하여 팀을 보강했다. 또한 세이부 시절부터 케빈 라이머, 케빈 미첼 등 현역 메이저 리그 선수 영입에도 힘썼다.
1999년 1월 구단 사장으로 취임했으나, 3개월 후인 4월 30일에 급성 심근 경색으로 사망했다. 향년 72세. 그 해에 호크스는 오사카에서 후쿠오카로 연고지를 옮긴 지 11년 만에 첫 우승을 차지했다. 같은 해 시즌 동안 원정 경기에서 그의 영정 사진이 벤치에 함께 했으며, 우승 축하 행사에서는 선수들이 번갈아 가며 영정을 들었다. 네모토는 일본 하리스토스 정교회 신자였기 때문에 유골은 교회 본부가 있는 도쿄 간다의 니콜라이 성당에 안치되었다.
2001년 야구 명예의 전당에 헌액되었다.[15]
11시즌 동안 감독을 맡았지만, 2년째 이후는 모두 B클래스였다. 그러나 팀의 기초를 다지는 수완은 높이 평가받아, 히로시마, 세이부, 다이에 모두 네모토가 감독에서 물러난 후 몇 년 안에 황금 시대를 구축했다. 감독으로서뿐만 아니라 팀의 지휘봉을 잡고 스스로 구단 경영과 팀 구성에 관여하여 세이부 시절에는 조직의 책임자로 활약했다. 현재 말하는 GM의 존재로 역사에 이름을 남겼다.[15]
세이부·다이에 프런트 시절, 잇따른 대형 트레이드 성사와 거물 신인 선수 획득으로 구단 안팎을 놀라게 하는 일이 많았다. 세이부 시절에는 드래프트 외 제도를 활용하고, 그룹 회사의 지원을 최대한 활용했다. 다이에 시절에는 당시 도입된 역지명 제도를 최대한 활용하여, 요미우리 등 다른 구단과의 경쟁에서 승리하며 전력 보강을 잇따라 성공시켰다.
예상을 뒤엎는 내용과 그 솜씨 때문에, 네모토가 주도하는 선수 보강은 "'''네모토 매직'''"이라고 불렸다.[15]
4. 네모토 매직
네모토 리쿠오의 전략은 네모토 매직이라고 불릴 정도로 뛰어났다. 그의 전략은 크게 트레이드, 드래프트, 해외 선수 영입, 그리고 폭넓은 정보망 구축으로 요약될 수 있다.
- 트레이드
- 다부치 고이치와 마유미 아키노부를 중심으로 한신과 대형 트레이드를 단행했다. (한신 고즈 쇼지로 사장과의 밀실 트레이드)
- 주니치의 주력 선수였던 다오 야스시나 히라노 겐을 트레이드로 획득했다.
- 드래프트
- 고마자와 대학을 중퇴하고 스미토모 금속에 입사하여 활동하고 있던 고지마 히로무를, 세이부가 1989년에 드래프트 외 입단으로 획득했다. 하지만, 이 입단 방법에 의문이 제기되었고, '''고졸 사회인 야구 선수는 3년간 프로에 들어갈 수 없다'''라는 야구 협약에 위반된다고 판단되어 계약이 무효가 되었다.[42]
- 세이부 구단은 제재금 50만 엔과 이후 고지마를 신인 및 이적 취급으로 획득하는 것이 금지되는 페널티를 받았다.[42]
- 네모토는 고지마를 포기하지 않고, 다음 해 3개월 동안 자택에서 고지마를 돌보며 야구 지도를 했다.[43]
- 해외 선수 영입
- 대만 야구계의 에이스였던 궈 타이위안을 획득했다. 후카미 야스히로를 통한 인맥으로 궈 타이위안 일가와 밀접한 관계를 구축, 오 사다하루가 직접 획득에 나서기 전에 계약을 맺었다.[44]
- 정보망 구축
- 히다카 고등학교 나카쓰 분교의 가키우치 테쓰야는 프로 야구에서 2번째 분교 출신 선수로, 네모토의 정보망이 주목받았다.
이러한 네모토의 전략은 때로는 논란을 일으키기도 했지만, 일본 프로야구의 선수 획득 방식과 구단 운영에 큰 영향을 미쳤다. 특히 요미우리는 네모토가 이끄는 세이부, 다이에에게 전력 보강에서 뒤처지는 결과를 낳았다.
4. 1. 세이부 시절의 네모토 매직
세이부 라이온즈 시절, 네모토 리쿠오는 대형 트레이드와 신인 선수 획득으로 야구계 안팎을 놀라게 했다. 드래프트 외부 제도나 세이부 계열 프린스 호텔 야구부를 최대한 활용했고, 다른 구단과의 쟁탈전에서 승리하며 전력을 보강했다. 이러한 의표를 찌르는 전략은 '''네모토 매직'''이라고 불렸다.- 아키야마 고지, 사사키 마코토를 중심으로 세이부와 트레이드를 진행했다.
- 마쓰누마 히로히사, 마사유키 형제에게 계약금으로 2명 합계 1.5억엔을 제시하여 요미우리를 제치고 영입에 성공했다.
- 이 사건으로 요미우리 계열 신문, 잡지에서 세이부 그룹 광고가 배제되고, 세이부 철도선 각 역 매점에서 요미우리 계열 신문, 잡지를 취급하지 않는 소동이 발생했다.
- 이시게 히로노리 등 사회인 야구(주로 프린스 호텔) 선수들을 적극적으로 영입했다.
- 1980년 드래프트 회의에서 1위 지명된 가와무라 가즈아키(한큐 지명)와 다카야마 이쿠오(일본 햄 지명)가 입단을 거부하고 프린스 호텔에 입단한 사건은 야구계에 큰 충격을 주었다.
- 이토 쓰토무를 구마모토 현립 구마모토 공업 고등학교 정시제에서 사이타마 현립 도코로자와 고등학교로 전학시키고 구단 직원으로 채용하여 다음 해 드래프트 1위로 지명했다.
- 구마가이구미 취업 예정이었던 구도 기미야스를 드래프트 하위에서 강행 지명 후 설득하여 입단시켰다.
- 당시 세이부 감독이었던 히로오카 다쓰로의 증언에 따르면, 네모토는 구도 지명에 반대했고, 히로오카가 적극적으로 지명을 추진했다고 한다.[41]
- 모리야마 료지에게 기타큐슈 대학을 중퇴시키고, 야구부가 없는 음식업 경영 회사에 입사시켜 다른 구단에게 무명 선수로 보이게 한 후 드래프트 1위로 지명했다.
- 세이부의 드래프트 1위 지명 후보가 나가시마 가즈시게라는 소문을 흘리고, 스즈키 겐을 드래프트 1위로 지명했다.
- 와타나베 도모오, 이시이 다케히로에게 부상 소문을 흘리고 드래프트 상위로 지명했다.
- 주니치의 주력 선수였던 다오 야스시, 히라노 겐을 트레이드로 획득했다.
- 고마자와 대학을 중퇴하고 스미토모 금속에서 활동하던 고지마 히로무를 1989년에 드래프트 외 입단으로 획득했지만, 야구 협약 위반으로 계약이 무효가 되었다.[42]
- 이후 고지마는 1990년 드래프트에서 주니치에 지명되어 입단했다.[43]
- 대만 야구계 에이스 궈 타이위안을 획득했다.[44]
- 히다카 고등학교 나카쓰 분교의 가키우치 테쓰야를 영입하며, 분교까지 망라한 정보망으로 주목받았다.
4. 2. 다이에 시절의 네모토 매직
西武일본어에서 감독 퇴임 후, 네모토는 프런트로서 수완을 발휘하여 다이에에서도 팀 강화를 추진했다.- 한신과의 사이에서 다부치 고이치와 마유미 아키노부를 중심으로 하는 트레이드를 실행했다.(한신의 오쓰 쇼지로와의 밀실 거래)[44]
- 마쓰누마 히로히사·마사유키 형제에게 계약금으로 2명 합계 1.5억엔을 제시하여, 1.2억엔을 제시한 요미우리를 제치고 형제 획득에 성공했다.[44] 이는 전력 보강 외에도 요미우리를 이겼다는 큰 의미를 가진 사건이었다.
- 세이부와의 사이에서 아키야마 고지·사사키 마코토를 중심으로 하는 트레이드를 실행했다.[44]
- 자신의 후임 감독으로 오 사다하루를 지명했을 때 "요미우리를 가정에 비유하면 나가시마 씨가 장남이고 오 씨는 차남이다. 일반적으로 차남은 가독을 잇지 않는다"라고 설득해 감독 취임을 수락받았다.[44]
- 이시게 히로노리를 시작으로 사회인 야구 선수(주로 세이부 그룹의 프린스 호텔)를 활용한 포위 전략을 펼쳤다.[44]
- * 특히 1980년 드래프트 회의에서 1위 지명된 가와무라 가즈아키(한큐 지명)와 다카야마 이쿠오(일본 햄 지명)가 입단을 거부하고 프린스 호텔로 진로를 결정한 것은 야구계에 큰 충격을 주었다.
- 이토 쓰토무를 구마모토 현립 구마모토 공업 고등학교 정시제에서 사이타마 현립 도코로자와 고등학교로 전학시키고, 구단 직원으로 채용하여 포위한 후 다음 해 드래프트 1위로 지명했다.[44]
- 구마가이구미 취업 예정이었던 구도 기미야스를 드래프트 하위에서 강행 지명하여 설득 끝에 입단시켰다.[41]
- 모리야마 료지에게 기타큐슈 대학을 중퇴시키고, 야구부가 없는 음식업 경영 회사, ONO 푸즈에 입사시켜 타 구단에게 무명 선수로 보이게 한 후 드래프트 1위로 지명했다.[44]
- 세이부 구단의 드래프트 1위 지명 후보는 나가시마 가즈시게라는 소문을 흘리고, 스즈키 겐을 드래프트 1위로 지명했다.(가즈시게는 다이요와의 경합 끝에 야쿠르트가 지명)[44]
- 와타나베 도모오·이시이 다케히로에게 부상 소문을 흘리고, 양자를 드래프트 상위로 지명했다.[44]
- 주니치의 주력 선수였던 다오 야스시나 히라노 겐을 트레이드로 획득했다. 한편, 세이부가 포위에 실패한 고지마 히로무를 주니치가 드래프트 1위로 지명하는 등, 호시노 센이치와의 관계를 구축했다.[44]
- 대만 야구계의 에이스였던 궈 타이위안을 획득했다. 히로시마 감독 시절 코치였던 후카미 야스히로를 통한 인맥으로 궈 타이위안 일가와 밀접한 관계를 구축, 대만에서 영웅으로 불리는 요미우리 감독 오 사다하루가 직접 획득에 나서기 전에 계약을 맺었다.[44]
- 히다카 고등학교 나카쓰 분교의 가키우치 테쓰야는 프로 야구에서 2번째 분교 출신 선수로, 네모토의 폭넓은 정보망이 주목받았다.[44]
4. 3. 네모토 매직의 영향과 평가
네모토 리쿠오는 감독으로서 뿐만 아니라, 구단 경영 및 선수 획득에서도 뛰어난 수완을 발휘하여 일본 프로 야구계에 큰 영향을 미쳤다. 그의 전략은 '네모토 매직'이라고 불릴 정도로 독창적이고 혁신적이었다.- 트레이드를 통한 전력 강화:
- 아키야마 고지, 사사키 마코토를 중심으로 세이부와의 대형 트레이드를 성사시켰다.
- 다부치 고이치와 마유미 아키노부를 포함한 한신과의 트레이드 역시 큰 주목을 받았다. (한신 고즈 쇼지로 사장과의 밀실 트레이드)
- 주니치의 주력 선수였던 다오 야스시나 히라노 겐을 트레이드로 영입하였다.
- 드래프트 전략의 혁신:
- 마쓰누마 히로히사・마사유키 형제에게 계약금으로 2명 합계 1.5억엔을 제시하며 요미우리를 제치고 영입에 성공했다.
- 사회인 야구(주로 세이부 그룹의 프린스 호텔)를 활용한 선수 확보 전략을 펼쳤다.
- 1980년 드래프트 회의에서 1위 지명된 가와무라 가즈아키와 다카야마 이쿠오가 입단을 거부하고 프린스 호텔로 진로를 정한 사건은 야구계에 큰 충격을 주었다.
- 이토 쓰토무를 구마모토 현립 구마모토 공업 고등학교 정시제에서 사이타마 현립 도코로자와 고등학교로 전학시키고 구단 직원으로 채용하여 드래프트 1위로 지명하였다.
- 구마가이구미 취업 예정이었던 구도 기미야스를 드래프트 하위로 강행 지명하여 설득 끝에 입단시켰다.[41]
- 모리야마 료지에게 기타큐슈 대학을 중퇴시키고, 야구부가 없는 음식업 경영 회사에 입사시켜 타 구단의 눈을 피해 드래프트 1위로 지명하였다.
- 나가시마 가즈시게를 드래프트 1위 지명 후보로 소문을 내고, 스즈키 겐을 1위로 지명하는 전략을 사용했다.
- 와타나베 도모오, 이시이 다케히로에게 부상 소문을 흘리고 드래프트 상위로 지명하였다.
- 고마자와 대학을 중퇴하고 스미토모 금속에서 활동하던 고지마를 에 드래프트 외 입단으로 영입했다가 계약 무효 및 제재금 처분을 받기도 했다.[42]
- 해외 선수 영입:
- 대만 야구계의 에이스였던 궈 타이위안을 획득하였다. 히로시마 감독 시절 코치였던 후카미 야스히로를 통한 인맥으로 궈 타이위안 일가와 관계를 맺고, 오 사다하루가 직접 나서기 전에 계약을 성사시켰다.[44]
- 정보망 구축:
- 히다카 고등학교 나카쓰 분교의 가키우치 테쓰야를 프로 야구 사상 2번째 분교 출신 선수로 발굴하는 등, 폭넓은 정보망을 구축하였다.
네모토의 이러한 전략들은 때로는 논란을 일으키기도 했지만, 일본 프로 야구의 선수 획득 방식과 구단 운영에 큰 변화를 가져왔다는 점은 부정할 수 없다. 특히 요미우리는 네모토가 이끄는 세이부, 다이에에게 전력 보강에서 번번히 뒤쳐지는 결과를 낳았다.
5. 감독 및 경영자로서
네모토 리쿠오는 '''구계의 책략가'''(球界の寝業師)라는 별명으로 불렸으며, 드래프트 회의와 트레이드에서 뛰어난 수완을 발휘했다. 그의 이러한 방식은 '''네모토 매직'''(根本マジック)이라고 불렸다. 직함은 달랐지만 실질적인 제너럴 매니저로서 능력을 발휘했다.[45]
스스로를 "이음새 감독"이라고 표현한 것처럼, 감독으로서는 뚜렷한 성적을 내지 못했고 재임 기간도 짧았다. 하지만 히로시마, 세이부, 다이에의 첫 우승을 위한 토대를 구축했다.[46]
세이부와 다이에 시절, 대형 트레이드와 신인 선수 획득으로 야구계 안팎을 놀라게 한 일이 많았다. 세이부 시절에는 드래프트 외부 제도나 세이부 계열 프린스 호텔 야구부를 최대한 활용했고, 다이에 시절에는 역지명 제도를 최대한 활용하여 요미우리 등 다른 구단과의 경쟁에서 이기고 전력 보강을 성공시켰다. 이러한 예측 불가능한 방식 때문에 '''네모토 매직'''이라고 불렸다.[47]
네모토 매직의 주요 사례는 다음과 같다:
- 다부치 고이치와 마유미 아키노부를 중심으로 한 트레이드를 한신과 실행 (한신의 오쓰 쇼지로와의 밀실 거래).
- 마쓰누마 히로히사·마사유키 형제에게 계약금으로 합계 1.2억엔을 제시한 요미우리에 비해 1.5억엔을 제시하여 마쓰누마 형제 획득에 성공.
- 아키야마 고지, 사사키 마코토를 중심으로 한 6인 트레이드를 세이부와 실행.
- 자신의 후임 감독으로 오 사다하루를 지명.
- 세이부의 에이스 투수였던 구도 기미야스를 FA로 획득.
- 프로 입단 거부 선언을 하고 고마자와 대학 진학이 내정되었던 조지마 겐지를 드래프트 1순위로 지명.
- 고쿠보 히로키, 이구치 다다히토, 마쓰나카 노부히코 등 톱 아마추어 선수를 모기업까지 움직여 역지명 제도를 최대한 활용하여 획득.
- 규슈 공립 대학의 시바하라 히로시는 "호크스 외에는 로손(당시 로손은 다이에 그룹)에 들어간다"고 발언하게 하여, 3순위로 지명.
- 지역 큐슈의 논프로인 규슈 공립 대학이나 미쓰비시 중공업 나가사키 등과의 친분을 쌓아 미래의 드래프트에 대비.
1999년 후쿠오카 다이에 호크스의 첫 우승 당시, 그해 4월에 네모토는 세상을 떠났지만, 첫 우승 다음 날, 나카우치 이사오 오너와 오 사다하루 감독으로부터 친필 감사 편지가 부인에게 보내졌다.
네모토의 방식은 다른 구단들도 따라하게 되었다. 특히 호시노 센이치 1차 정권 시대의 주니치는 적극적인 트레이드 등으로 세이부와 함께 시즌 오프에서 많은 화제를 제공했다.
네모토의 선수 획득책은 프로 야구 제도에도 영향을 미쳐, 1991년 말까지 지배하 선수 쿼터를 70명으로 설정하고 연습생으로서의 계약을 금지했으며, 같은 해 가을 드래프트 회의 이후에는 드래프트 외 선수 획득이 불가능하게 되었다.
2007년 3월에 발각된 세이부 구단의 아마추어 선수에게의 금전 제공 문제에서, 네모토가 팀 만들기에 주력했던 1978년부터 금전 제공이 계속되고 있었음이 밝혀졌다. 따라서 금전 제공 문제는 네모토의 팀 강화책에 의한 부정적인 유산으로 취급되기도 한다.
와타나베 히사노부는 인터뷰에서 네모토를 구단 GM으로서 목표로 하는 인물로 꼽았지만, 현대에는 컴플라이언스 문제 등으로 네모토의 방식이 통용되지 않을 것이라고 지적했다.
연도 | 소속팀 | 경기 | 타수 | 안타 | 2루타 | 3루타 | 홈런 | 타점 | 도루 | 볼넷 | 사구 | 삼진 | 타율 |
---|---|---|---|---|---|---|---|---|---|---|---|---|---|
1952 | 긴테쓰 | 46 | 85 | 16 | 3 | 0 | 2 | 8 | 1 | 5 | 1 | 13 | .188 |
1953 | 110 | 257 | 53 | 4 | 1 | 0 | 15 | 3 | 14 | 1 | 37 | .206 | |
1954 | 10 | 11 | 0 | 0 | 0 | 0 | 0 | 0 | 2 | 0 | 2 | .000 | |
1957 | 20 | 17 | 1 | 0 | 0 | 0 | 0 | 0 | 0 | 0 | 4 | .059 | |
통산: 4년 | 186 | 370 | 70 | 7 | 1 | 2 | 23 | 4 | 21 | 2 | 56 | .189 |
6. 상세 정보
네모토 리쿠오는 선수, 코치, 감독, 프런트 등 다양한 역할을 수행하며 일본 프로 야구 발전에 큰 영향을 미쳤다. 특히 팀의 기반을 다지고 장기적인 성장을 이끄는 능력으로 '네모토 매직'이라는 평가를 받았다.
- 폭넓은 인맥: 5천 명에서 1만 명에 달하는 폭넓은 인맥을 자랑했으며, 이는 선수 스카우트 및 팀 운영에 큰 도움이 되었다. 곤도 다다유키는 싱가포르에서 "나는 네모토와 알고 있습니다"라고 말하는 사람을 만났을 정도로 그의 인맥이 넓었다고 회고했다.[45]
- 은퇴 선수 지원: 은퇴 선수들의 재취업을 적극적으로 지원하여 선수들로부터 존경을 받았다. 세이부 시절에는 은퇴 선수 전원에게 세이부 구장 프리 패스 '가족증'을 보내주기도 했다.[45]
- 지도 철학: 선수 개개인의 장점을 살리고 장기적인 성장을 도모하는 지도 철학을 가지고 있었다. 이하라 하루키는 네모토로부터 "선수를 지도하지 않아도 좋으니 제대로 지켜보도록 해"라는 조언을 받았다고 회고했다.[45] 야기사와 소로쿠는 네모토가 팀의 기반을 다진 후 승리할 수 있는 감독에게 지휘봉을 넘기는 방식을 추구했다고 언급했다.[45]
- 언론 대응: 세이부 시절에는 '특수 잠항정'이라는 별명처럼 언론 노출을 꺼렸지만, 다이에 시절에는 적극적으로 인터뷰에 응했다. 다만, 추상적인 표현을 자주 사용하여 '언어 대량, 의미 불명'이라는 평가를 받기도 했다.[45]
- 선수 육성: 오미치 노리요시는 네모토를 "1군에 고정시켜준 은인"이라고 평가했으며,[45] 오치아이 히로미쓰는 네모토로부터 감독, 코치직 제안과 함께 조언을 받았다고 회고했다.[45]
- 트레이드 일화: 사사키 쿄스케와의 일화를 통해 선수 발굴 및 트레이드에 대한 감각을 엿볼 수 있다.[45]
- 선수 획득 전략: 드래프트와 트레이드를 통해 유망주를 적극적으로 영입하여 팀 전력을 강화했다. 특히 역지명 제도를 활용하여 고쿠보 히로키, 이구치 타다히토, 마쓰나카 노부히코 등 톱 아마추어 선수들을 영입했다.[45] 지역 밀착을 중시하여 규슈 지역 출신 선수들을 우선적으로 지명하는 전략을 펼치기도 했다.[45]
- 영향력: 네모토의 선수 획득 전략은 다른 구단에도 영향을 미쳐 프로 야구 제도 변화를 이끌어냈다. 요미우리는 네모토가 이끄는 세이부, 다이에에게 선수 획득 경쟁에서 밀리는 경우가 많았다.[45] 1991년 이후 드래프트 외 선수 획득이 불가능하게 된 것도 네모토의 영향으로 볼 수 있다.[45]
- 비판: 아마추어 선수에게 금전을 제공하는 문제가 네모토 시절부터 시작되었다는 비판도 존재한다.[45] 와타나베 히사노부는 네모토의 수법이 현대에는 통용되지 않을 것이라고 지적했다.[47]
연도 | 팀 | 순위 | 경기수 | 승리 | 패전 | 무승부 | 승률 | 팀 홈런 | 팀 타율 | 팀 방어율 | 연령 | ||
---|---|---|---|---|---|---|---|---|---|---|---|---|---|
1968년 | 쇼와 43년 | 히로시마 | 3위 | 134 | 68 | 62 | 4 | .523 | 112 | .224 | 2.91 | 42세 | |
1969년 | 쇼와 44년 | 6위 | 130 | 56 | 70 | 4 | .444 | 121 | .221 | 3.24 | 43세 | ||
1970년 | 쇼와 45년 | 4위 | 130 | 62 | 60 | 8 | .508 | 108 | .226 | 3.00 | 44세 | ||
1971년 | 쇼와 46년 | 4위 | 130 | 63 | 61 | 6 | .508 | 89 | .233 | 3.11 | 45세 | ||
1972년 | 쇼와 47년 | 6위 | 47 | 16 | 29 | 2 | .356 | 117 | .250 | 3.57 | 46세 | ||
1978년 | 쇼와 53년 | 크라운 세이부 | 5위 | 130 | 51 | 67 | 12 | .432 | 109 | .268 | 3.75 | 52세 | |
1979년 | 쇼와 54년 | 6위 | 130 | 45 | 73 | 12 | .381 | 140 | .259 | 4.60 | 53세 | ||
1980년 | 쇼와 55년 | 4위 | 130 | 62 | 64 | 4 | .496 | 219 | .267 | 4.43 | 54세 | ||
1981년 | 쇼와 56년 | 4위 | 130 | 61 | 61 | 8 | .500 | 143 | .267 | 3.62 | 55세 | ||
1993년 | 헤이세이 5년 | 다이에 | 6위 | 130 | 45 | 80 | 5 | .360 | 75 | .246 | 4.22 | 67세 | |
1994년 | 헤이세이 6년 | 4위 | 130 | 69 | 60 | 1 | .534 | 132 | .275 | 4.10 | 68세 | ||
통산:11년 | 1351 | 598 | 687 | 66 | .465 | A클래스 1회, B클래스 10회 |
- 1972년은 시즌 도중(6월 15일)까지의 기록.
- 크라운(크라운라이터 라이온즈)은 1979년에 세이부로 구단명을 변경.
- '''8''' (1952년 - 1957년)
- '''40''' (1962년 - 같은 해 도중)
- '''60''' (1962년 도중 - 1966년)
- '''68''' (1967년 - 1972년, 1978년)
- '''81''' (1979년 - 1981년, 1993년 - 1994년)
6. 1. 선수 경력
이바라키현 미토시의 자산가 집안에서 태어나 이시가미 촌(현재의 도카이촌)에서 성장했다. 일본 원자력 연구소 유치를 결정한 아버지의 영향으로 정교회 유아 세례를 받고, 야구와 인연을 맺게 되었다. 릿쿄 대학에 임시로 '들어갔던' 것이 발각되어 출장 정지 처분을 받기도 했지만, 호세이 대학으로 이동하여 선수 생활을 이어갔다. 1952년 긴테쓰에 입단하여 프로 선수 생활을 시작했다.1957년 현역에서 은퇴한 후에는 스카우트와 코치로 활동하며 도이 마사히로 등의 선수를 육성하는 데 기여했다.
선수 시절 기록은 다음과 같다.
연도 | 소속 | 경기 | 타석 | 타수 | 득점 | 안타 | 2루타 | 3루타 | 홈런 | 루타 | 타점 | 도루 | 도루자 | 희생 번트 | 희생 플라이 | 볼넷 | 고의 4구 | 사구 | 삼진 | 병살타 | 타율 | 출루율 | 장타율 | OPS |
---|---|---|---|---|---|---|---|---|---|---|---|---|---|---|---|---|---|---|---|---|---|---|---|---|
1952년 | 긴테쓰 | 46 | 92 | 85 | 9 | 16 | 3 | 0 | 2 | 25 | 8 | 1 | 0 | 1 | - | 5 | - | 1 | 13 | 1 | .188 | .242 | .294 | .536 |
1953년 | 110 | 284 | 257 | 12 | 53 | 4 | 1 | 0 | 59 | 15 | 3 | 2 | 12 | - | 14 | - | 1 | 37 | 4 | .206 | .250 | .230 | .480 | |
1954년 | 10 | 13 | 11 | 0 | 0 | 0 | 0 | 0 | 0 | 0 | 0 | 0 | 0 | 2 | - | 0 | 2 | 0 | .000 | .154 | .000 | .154 | ||
1957년 | 20 | 17 | 17 | 0 | 1 | 0 | 0 | 0 | 1 | 0 | 0 | 0 | 0 | 0 | 0 | 0 | 4 | 0 | .059 | .059 | .059 | .118 | ||
통산 : 4년 | 186 | 406 | 370 | 21 | 70 | 7 | 1 | 2 | 85 | 23 | 4 | 2 | 13 | 0 | 21 | 0 | 2 | 56 | 5 | .189 | .237 | .230 | .467 |
긴테쓰 입단 후 개막부터 선발 포수로 출장했고, 뛰어난 기억력으로 투수진과 수뇌진 모두에게 신뢰를 받았다.[8] 1953년에는 주전 포수로 기용되었으나, 1954년에는 다다 후미히사, 하라 카츠히코에게 주전 자리를 내주었다. 1955년부터 1956년까지는 아쿠타 타케오 감독을 지원하며 투수 로테이션을 결정하기도 했다.[8]
1957년 은퇴 후, 스카우트, 2군 매니저[8], 2군 코치를 역임하며 도이 마사히로를 키워냈다.